수미산에도 가을이 있을까. 단풍과 낙엽, 높아진 하늘, 깊어진 바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이 사바의 가을만 할까. 이 고단하고 지난한 삶에서 한 번 쯤 하늘을 보게 되는 시간, 번개처럼 지나가는 이 짧은 계절만 할까. 수미산 끄트머리, 사바는 지금 가을이라는 시절에 물들어간다. 문 밖의 모든 것들이 깊어간다. 하늘이 깊어가고 숲이 깊어가고 바람도 깊어간다. 이제 우리가 깊어가야 할 시간이다. 이 짧은 시절에 우리는 하늘보다, 숲보다, 바람보다 깊어져야 한다. 말마다 글마다 걸음마다,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보다 우리의 두 눈이 더 깊
해발 629M 벼랑 끝에 오르면 속세의 모든 미련과 그리움을 끊어낼 수 있을까. 그 옛날, 사라진 고려를 잊지 못했던 고려의 마지막 신하 셋은 그 그리움을 끊어내기 위해 절벽 끝으로 올랐다.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에는 보위에 오르지 못한 조선의 두 왕자가 시절의 미련과 그리움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같은 곳을 찾았다.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그곳은 나한의 도량이었다. 기도가 전부인 하루와 멀어진 시간이 전부였던 그들은 나한의 품에서 한 시대를 잊었다. 그리고 시절과 함께 사라졌다. 도량은 관악산(해발 629M) 정상에 자리
산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 역시 마찬가지다. 오대산에는 관음, 지장, 대세지, 문수, 나한 등 5만의 보살이 상주한다. 오대산의 이름은 5만의 보살이 상주하는 ‘다섯 곳(5대)’에서 왔다. 산 전체가 부처님의 그늘이다. 어디서 길을 시작해도 길 끝에서 부처님을 만나게 되어있다. 또한 어디에서 길을 잃어도 부처님을 만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오대산을 걷는 일은 모두 ‘순례’다. 어느 길에 들어서도 부처님의 그림자를 밟게 된다. 오대산에 선다. 그 옛날 자
신라말 부설 거사 창건나옹 선사 출가 도량요연과 문답 후 유행길 시작사면석불 내려 보는 자리나옹, 무학, 함허 등 수행처근현대, 경허ㆍ청담ㆍ성철도안거철엔 묘적의 선방 “등산로 없음, 참배객은 조용히” 암자 입구에 걸린 안내문이다. 더 이상 길은 없다. 길은 끊어지고, 그 길 끝엔 깊은 고요뿐이다. 그리고 그 적적함과 적적함 속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길 없는 길’이다. 어디를 보아도 길은 없고, 어디를 보든 그것이 길이다. 닿고자 하는 만큼 길은 보이고, 보고자 하는 만큼 길은 다가온다. 다른 길을 찾아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은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동분서주하고 있다. 찾아야하는 ‘나’, 그것은 힘겨운 시간 속에 있을 때 더욱 간절해진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종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풍경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한다. 숲길 끝에, 산자락 끝에, 물가의 끝에 서는 것이다. ‘끝’에 서보는 것이다. 끝에 서서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은 ‘나’를 보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의 길이 없는 곳에서, 더 이상의 생각이 필요 없는 곳에서 오직 ‘나’를 찾는 길
해발 530m 기암절벽 유리광전원효 스님 손톱으로 마애불 새겨도선 스님 풍수철학 완성한 곳신라부터 고려까지 선지식 수행처 중생은 아프다. 아프니까 중생이다. 아픈 중생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 아픔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하면, 성불하여 정토에 나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에게 성불과 정토는 어려운 문제다. 정토를 구현하기 위한 성불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것이 중생에게는 쉽지 않은 일대사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쉽지 않은 길에는 여래가 한 분 계시다. 약사여래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이라는 것에는 저마다 뜻이 있다. 각자는 하나의 ‘뜻’으로 존재한다. 유정은 유정대로 무정은 무정대로, 수없이 많은 뜻으로 와있는 것이다. 산의 이름 하나, 암자의 이름 하나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것만큼 뜻에서 시작하고 뜻으로 끝나는 것이 또 있을까. 같은 모습의 전각과 마당을 가진 것이 도량이지만 도량마다 뜻을 달리하여 서있고, 같은 모습의 초목과 산새들을 품은 것이 산이지만 그 역시 저마다 다른 뜻으로 서있는 것이다. 산의 이름은 저마다 다른 정기를 뜻하고, 암자의 이름은 그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각자의 ‘자리’가 있다. 꽃들이 피고 져온 자리, 새들이 살아온 자리, 숲이 지켜온 자리, 중생이 걸어온 자리, 깨달음으로 가는 불보살의 자리 등 그 자리는 자리마다 불가설불가설전의 시간과 무궁무진의 까닭으로 있어온 인과의 설법이다. 그 자리 하나하나에 깃든 시간과 까닭의 끝에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니 옮기는 자리마다 더욱 깊은 시간과 더욱 선명한 까닭 속에 있어야 하리라. 그 뜻이 쉽지 않음으로 우리는 길과 길 사이에 불전을 세우고, 산기슭마다 불보살을 모셔왔다. 그 길과 산을 잇는 불보살의 자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