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스님, 차문화 중흥조 평가 스님의 자태, 단아·온화한 선승 존상외에는 일체장식 제거해 표현 초의 스님(1786-1866)은 조선시대 후기 쇠퇴했던 한국 차 문화를 복원·정립시킴으로써 근현대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초의 스님은 한국 차 문화의 중흥조로 평가 받았다. 10여 년 전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초의선사 초상화를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다. 초상화는 액자와 유리가 벗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비단과 안료, 선묘의 탄력 등은 물론이고 배첩의 상태까지 확인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당시의 감상과 분석 기록물을 바탕으로 그 초의 스님 진영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진영의 첫 인상은 ‘일본화 같다’는 생각이었다. 일본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면 일제 강점기 시절 어
송담 스님을 그리기로 하였다. 경허, 만공, 전강 스님의 선맥을 잇는 우리시대의 대선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없었다. 더욱이 용주사의 사태로 스님께서 조계종단에 탈종선언을 한 직후여서 더욱 뵙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서로 마음을 통하는 지인으로부터 송담 스님께서 인천 용화사에서 결제 법문을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다음날 용화사를 찾았다. 3분 간 스님 눈 맞추며 관찰 아름다운 번민과 고뇌 발견 과거 손가락 다쳐 고통 받던 중 無(무)자 화두 깨우쳐 용화사 법보전은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건물 밖의 복도는 물론이고 계단 아래에까지 스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선사의 위용을 실감했다. 스님의 법문
스님이 가진 것 더 나누고자 고민하는 모습서 ‘항상심’ 느껴 어떤 사람이든 마음으로 안아 ? 사진작가 주명덕 선생님과 동행하여 운문사에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학장스님이신 명성 스님을 만나 뵈었다. 스님께서는 자상하고 따뜻하며 상대에 대해 세심한 배려가 몸에 밴 분이셨다. 나는 그런 스님의 모습에서 진심과 정성을 느꼈다. 우리 일행은 학인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에서 쉬며 새벽부터 밤까지 암송하는 스님들의 맑고 청아한 글 읽는 소리에 빠져들었다. 운문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 나의 아이들이 운문사 여름불교학교에 참여했고, 가족 나들이와 특강 그리고 탁본 등을 위해 여러 차례 운문사를 찾았다. 스님께서도 내가 개인전을 할 때마다 올라오시어 격려해 주셨다. 이런 인연들로
‘판치생모’ 화두 타파하며 전강 ‘대선사’ 호칭 얻어 생명력 자체란 사실 깨달아 스님 모습 그리는 것 아닌 살아있는 에너지 마주해 ? 창작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와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특히 그림 도구에 대한 자세는 자신이 어떻게 예술을 생각하는지의 여부와 관련이 깊다. 작품을 하는 모든 재료는 창작자 자신이 몸과 생각을 씻고 관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차적 재료인 먹을 가는 벼루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선비들이 거론한 벼루에 대한 글들이다. “먼지를 털고 벼루를 씻으며, 향을 사르고 차를 끓이고, 화병에 꽃을 꽂고 주련을 걷어 올리니, 일마다 몸소 하기에 힘들지가 않다” “비록 글씨는 잘 쓰지 못하더라도 붓과 벼루만큼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스님의 진영 그리며 구도정신에 비중둬 왜 스님이 우리시대 대선사인지 이해 풍모가 느껴지는 순간 먹을 갈았다 먹빛 속에라도 남겨 기록하고 싶었다 예술 작품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다양한 인식과정을 거친다. 먼저 창작가가 의도하는 이미지가 있고 다음으로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다. 두 사람의 생각과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그것은 사회 통념을 통해 도달하는 인식과 각자 개인의 선천적인 인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마다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작품은 해석의 문제이다. 해석은 비울수록 본질에 가까워진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폭이 넓을수록 좋다. 그럴 때 보편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감염력도 크다. 좋은 작품의 조건들이다. 전강
? ?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스님 법문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말을 지워나갔다 마지막 남은 단어가 ‘무아’였다 2003년 5월 대학 선배이신 자운형이 비구니 스님 한 분을 모시고 찾아왔다. 대전에 있는 선방에서 수행중인 상경 스님이라 했다. 세 사람은 동양화과 선후배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아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인간의 이상에 이르기까지 편안하게 대화했다. 대화 말미에 이르자 스님은 노란 서류봉투 속에서 오래된 흑백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 사진이었다. 나는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말했다. 그러자 스님은 경허, 만공, 전강, 송담 스님으로 이어지는 선맥에 대해 설명했다
? 쉼 없이 공부에만 정진했다. 시간을 황금이라 말하며 헛된 인생 살지 말라고 했다 예술은 주어진 현실의 재생이 아니라 현실의 발견이다. 그림은 형상을 그리는데 있는 게 아니라 형상 너머의 뜻까지 그리는데 의미가 있다. 미는 사물의 직접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 정신에 대한 관계를 내포한다. 그래서 작가는 대상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이때의 해석은 개념과 사고에 의한 해석이 아니라 직관과 감각에 의한 해석이다. 예술 작품은 정신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정신의 철학이다. 한 인물을 알기 위해 그 인물은 물론 그림자의 배후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이 발견 된다. 이럴 때 작가는 표현 대상 인물에 대한 영혼의 움직임과 전체로서의 삶, 위대함과 연약함
스님에게 계율은 생명이었다 아니 생명보다 우선했다 스님의 자세는 종교처럼 신성했다 개인 초대전시회에 메모가 남겨있었다. 전화를 드렸다. 미술 평론가 손철주 선생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았다며 상의할 게 있다했다. 나는 소개한 이를 신뢰하고 있기에 약속을 했고 다음날 만났다. 김 회장은 사업을 크게 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이야기 내내 진지함과 절실함이 있었다. 요점은 “곡성에 있는 극락암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청화 스님 초상을 모시고 싶다. 이 두 분을 잘 모실 수 있도록 진영을 그려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분과의 관계를 물었고 특히 노 대통령 진영을 모시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의견 교환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스님의 눈에 고인 눈물과 어지러운 눈썹을 그렸다 말 못할 번뇌를 안고 가시는 눈물 머금은 스님의 눈빛은 잊을 수 없다 송광사 강주이신 덕조 스님의 전화가 있었다. 통광 스님의 건강이 나날이 좋지 않으니 인사를 드렸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스님의 말씀에 시간의 절박함이 묻어 있다고 판단해 즉시 구례 행 버스를 탔다. 구례 터미널에서 스님을 만나 통광 스님이 계시는 곳에 도착했다. 암자 입구에는 오디가 진흙위에 떨어져 달디 단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 떨어진 흔적 주위에는 벌이며 나비가 단물을 탐하느라 바삐 날개를 움직여서인지 시원한 바람이 일렁였다. 통광 스님을 만나기 전 스님께서 사시는 절 입구 공간이 주는 느낌은 이랬다. 스님의 첫 인상은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
만해는 저자거리에 있지만 위대해 스님 시의 핵심은 역설과 모순 현실 돌파해 나가는 예술 보여줘 최근 한국 전통의 한지를 찾기 위해 전주 완주 임실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나는 전통한지의 원형을 찾고자 30년 이상 한지 제작현장을 방문했고 지장들의 생산품을 수집해 왔다. 그러나 이번 답사는 달랐다. 내 개인의 지적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행정자치부의 전통문화 복원과 현실화에 대한 관심에 의해 실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자문은 현 정부가 전통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행정부처가 한국문화에 대한 전통성과 문명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다만 이런 관심이 진작 문화재청에서 관심을 갖고 추진했어야 할 일인데 그렇지 못한 점은 안타까
지관 스님의 눈빛을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 속에 깊은 갈등이 있었다. 스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 중 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스님은 한국불교사에 불교대사전 편찬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일은 스님이 입적한 지금에도 후학들에 의해 올곧게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스님이 펼친 대역사에 대해 공감하고 동참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 한국 불교의 힘이며 가능성이다. 지관 큰스님. 나는 스님을 네 번 뵈었다. 한 번은 총무원 집무실에서 또 한 번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서 뵈었고 긴 시간 동안 경국사에서 뵈었으며 소공동에서 식사를 함께하면서 뵈었다. 모두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의 자리였다. 두
나는 스님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도 불었다. 만장을 든 스님과 보살들이 무던히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이 만장을 하늘로 치켜 올렸고 올라간 만장은 한량없는 곡선을 반복하며 무한대로 증폭시켰다. 긴 폭의 만장이 만들어내는 곡선은 바람의 섬세한 빗질이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이었다. 천의가 움직이며 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키는 비천의 현현한 모습과 방불했다. 바람결에 옆으로 누운 대나무는 사선을 이루며 우열을 경쟁하듯 하였고 대나무에 붙어있는 일부의 만장은 타원형으로 부풀어 올라 바람을 거스르며 상승 곡선을 만들었다. 그날 다비장 풍경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특별함이었다. 스님은 마지막 가실 때에도 오색찬란한 색깔로 허공에 춤을 추었고 바람 소리로 순간을 가르며 법문을 하
스님의 눈은 선과 형태 그리고 명암이 뚜렷하다. ‘눈부처’와 같다. 눈빛은 맑고 파랗고 깊다. 광덕 스님은 “깨닫기 전에는 너 자신도 의심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준수하셨다. 깨달은 자의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경이라며 평생 동안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 항상 공부하고 실천하신 분이셨다. 스님의 정신적 깊이는 화가의 눈으로 감히 알 도리가 없지만 광덕 스님을 떠올리면 우선 머리 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어질고 친근했으며 항상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생활이었다. 도심 대중 포교에 전력하였고 유머와 배려심이 몸에 가득 했다. 스님의 자태는 순일하다. 특히 앉아 계실 때 모습을 보면 얼굴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어께는 오른쪽이 내려가 있어 수줍은 듯 단아하다. 여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실천하셨다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는데 온힘을 바쳐 진심을 다하셨다 ? 십여 년 전, 나는 범어사 진영각에 모실 광덕·지효 스님의 진영을 의뢰받아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그림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범어사를 찾았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 진영각은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림은 찾을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에 진영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찰나,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박물관 학예사는 두 스님의 진영이 박물관에 없다며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허탈했다. 범어사는 용성 스님과 동산 스님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기라성 같은 선승을 배출한 기백 있는 문중이 아니던가. 나는 범
집착을 놓고 자유로움을 찾는 것 물질적 욕망을 내려놓지만 자족, 검박, 만족하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 무소유일 것이다. ? 최근 많은 시간을 내 자신을 위해 투자했다. 혼자 명상에 잠긴 적이 많았다. 자기 삶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이 있다는 것이 힘이었다. 돌이켜보니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나의 삶과 인간을 이해하고 나아가 나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독한 시간이 자기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기 스스로 담론하고 덜어내면서 진취성을 잡아내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자유로움
?법정 스님을 그리며 찾은 불일암에서 여백을 보았다. 자연은 남겨 놓음으로써 담담하게 본질을 이야기 한다. 눈썹은 한 인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신체 부위이다. 눈썹 숱이 짙고 굵은 사람은 단호하고 진중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숱이 약하고 가늘며 거의 없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인상으로 보인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가늘고 엷게 다듬는다. 보다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눈썹에도 남녀의 차이가 있으며 눈썹 미학이 다르게 존재해 왔다. 눈썹은 피부에서 나오는 시작 부분은 옅은 색을 띠는 반면 끝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져 자연스런 색상을 가진다. 눈썹을 잘 그리면 대상 인물의 특징이 살아날 정도로 큰 역할을 한다. 눈썹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서양에서 쥐의 가죽을 붙일
?적요하고 무심한 모습을 이미지화 맑고 청수한 느낌 전달 받도록 의도 자료 거듭 확인하며 스님 모습 화폭에 여러 의견 듣고 종합… 진영 5점 제작 실존하는 삶의 전형 기록하고자 노력 ? 인간은 누구나 온전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 다만 타인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거울은, 사실 타자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는 장치다.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보다 타자의 시선에 더욱 의미를 두고, 남을 통해 자신을 평가하고 됨됨이를 인정받는다. 그래서 현대인은 거울과 저울의 지배를 받고 살아간다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말씀은 남의 눈에 비치는 타자의 눈보다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눈이 더욱 진실하다는 점을 알게 하였다. 나
스님이 마지막으로 떨쳐 버렸어야 할 것이 세상의 명예욕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한계나 인연의 또 다른 모습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면 스님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 놓은 숙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나는 최근 직지사 중암에서 거행된 관응 큰스님 추모비 제막식에 다녀왔다.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께서 제막식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를 추모비 뒤쪽으로 부르시더니 관응스님과 나와의 인연을 이야기 하셨다. 스님께서 가리키는 내용은 법정 스님이 2008년 지은 글로서 “…김호석 화백이 그린 진영(眞影)에 스님은 이런 글을 남겼다…”는 글귀였다. 법정 스님께서 김호석 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신 것을 보는 순간 스님에 대한 생각과 인연이 다시금 생각났다. ? 나는 대학
거침없는 우리 아버지 “중이 이렇게 잘 먹어서야” 관응 스님 “손님 덕”이라며 유쾌히 포용 “무문관 8년에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스님은 말없이 등을 보이셨다 스님은 내 가족에게 무척이나 살뜰하셨다. 거침없는 성격의 아버지와도 제법 말이 통하셨던 모양이다. 연락할 때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셨고 여러 번 동행을 청하셨다. 스님과 아버지와의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난다. 한번은 스님과 아버지가 여느 때처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다. 식탁 위에는 정성을 다해 차린 귀한 반찬이 여럿 올라왔다. 송이버섯과 송이버섯 장아찌, 야생 더덕구이, 양해, 송이버섯 미역국, 산초간장 등이 상을 채웠다. 아버지 역시 특별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조용하던 식사가 끝나갈 때 아버지는 한
벌이 사람보다 낫다는 농담 한마디에도 무생물조차 존재 의미있다며 정색하시던 스님 분별력 뛰어넘는 ‘유연한 사고’ 강조 20년 지난 지금도 스님의 가르침 기억 관응 스님께서 물으셨다. “김 화백,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왜 그리나요? 그림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까?” 나는 원초적인 질문에 당황했다. 스님의 질문은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저는 조선의 된장 냄새를 그리고자 합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모습과 이 땅에서 숙명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정신을 그리고 싶습니다. 불의와 억압, 그리고 압제를 뚫고 잃어서는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대중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