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입이라는 것육입(六入, salayatana)은 육근으로 하여금 육경을 느끼게 하는 환경이다. 육입은 안·이·비·설·신·의하고는 다르다. 그런데 분명 안·이·비·설·신·의는 아닌데 안·이·비·설·신·의가 나타날 수 있는 근거가 육입에서 생기게 된다.6근인 안·이·비·설·신·의는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맛을 볼 수 있는 인식기관, 들을 수 있는 인식기관, 볼 수 있는 인식기관,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형성, 이런 것들이 다 명색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육입단계이다.육
데카르트는
무아와 무상을 연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연기적인 세계가 이루어지고, 또 실상적인 관점에서는 생멸의 세계가 결국 불생불멸의 세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론은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이해할 때 생멸의 세계는 허망하다 혹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한다.“자성은 없다. 그래서 공이라고 한다” 〈금강경〉 〈반야경〉 계통은 모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세계, 연기로 이해하는 것은 무아와 무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생멸이 이어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무상하다, 허망하다고 이야기하고, 결국 본질은 공이라고 한다.이 구조에서 A법
우리가 공부한 6근·6경·6식, 시간연기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으로 되어 있다. 이제까지는 일체법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에 들어오니까, 이제까지 있었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 없어지고, 색수상행식으로 출발한다. 여기에는 6근도 없고 6경도 없고 6식도 없다. 이것은 생명체가 형상이 생기기 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몸뚱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근본적인 개념이 오온으로부터 출발한다.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본
시간과 공간은 원래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태초에 나타난 것이 ‘공간’이며 나타난 것의 움직임이 ‘시간’이 되는 것이다. 시공간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16살 때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물체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라는 화두에서 출발된다.‘촉’은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스파사 즉, 충돌이다. 부딪치는 것이다. 6근·6경·6식이 결합하여 부딪쳐 촉이 이루어진다. A에서 B로 변했을 때 변하기 전 A가 나 자신인가? 변하고 난 후의 B가 나인가? 충돌이 일어나기 전의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인식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 하는 방법과 공간적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또 시공간이 통합된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오온 연기는 공간적 관점에서 연기를 보는 것이며 12연기는 시간적 관점과 공간적 관점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방법이다. 연기에 대한 인식 시간연기에 대해서는 제18장 일체동관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부처는 육안이 있느냐?”그러자 수보리는 “예 육안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
색을 연하여 생긴 부정사유는 어리석음, 치를 낳는다. 바로 색·성·미·향·촉·법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은 색이라 한다. 색으로 인하여 생긴 부정사유가 치를 낳는다. 치가 곧 무명이다 치심으로 추구하는 욕을 애라고 한다. 애가 짓는 행위를 업이라 한다. 거꾸로 다시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놓은 것이다.무엇이 존재하는가부처님께서는 불교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12처가 불교다’라고 말씀하셨다. 12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로 나와 대상이다. 예를 들어 지금이 부처님 당시라고 생각하자. 불교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연기의 기본 12처연기의 구체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인 12처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자.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는 것이 10분의 1에 해당하는 내용에 불과하다. 6근·6경의 12처 18계, 육육법연기, 오온연기, 12연기의 골격은 물속에 들어있는 9/10에 해당되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이 부분을 이해하고 나면 세상 어디에 있어도 두려움이 없이 나는 불자라고 큰소리 칠 수 있을 만큼 떳떳해진다. 중요한 것은 확신이 없고 자신이
회의론을 극복하고산자야는 회의론을 창시한 자로 회의외도라고 한다. 회의론을 주장하면서 인도의 모든 지식인층에게 공감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산자야이다. 모든 사람이 산자야의 회의론을 신봉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그 당시 인도 사상계의 현황이었다. 그래서 산자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정하였다. 어떤 주장도 결정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다는 주장과 답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산자야가 주장한 회의론이다. 이 회의론이
기원전(B.C) 1500~2000년 경 인도에서 베다문명이 완성된다. 인도에서 기본적으로 존재한 종교인 브라만교는 바로 신에 대한 예찬이고 신에 대한 종교이다. 이것은 B.C 2000년에 시작해서 B.C 1500년에 완성되어 인도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브라만교이다. 그런데 B.C 5~6세기쯤 되니까 인도에서도 인간 중심의 사상이 일어나게 된다.육사외도라는 사상가들이 출현한다. 인도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 여섯 명의 육사외도다. 부처님을 포함시키면 사상가 그룹이 일곱 명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제외한 나머지
부처님께서 가르친 연기는 어떻게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가? 연기가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 과정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불교교리, 불교의 전반적인 부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존재에 대한 인식문제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 속성이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했으며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무아와 무상을 아는 것은 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아는 것이 연기라고 했다. 즉 불교의 체계화는 근본적으로 무아와 무상에 대한 인식이 연기가 됨을 아는 것이다. 이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깨달음에
카필라상의 왕자였던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에 4대 성문에서 늙은이·병자·죽은 자의 상여·출가 수행자를 보고 삶의 허망함과 고통을 인식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싯다르타는 ‘8살 때부터 왜 죽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고, 29세에 출가의 길을 나서게 된다. 6년 동안의 수행을 통해 죽음에 대한 해답인 ‘연기’를 얻었다. 이를 두고 나중에 회상하기를 “나 전에도 이후에도 나만큼 고행하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연기에 이르는 방법론이 사성제이며, 실천덕목이 팔정도인 것이다.정견(正見)정견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난 후
내 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 유익함을 찾기 어언 51년/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고/ 조용히 사색하며 살아왔다네/ 이 길을 떠난 수행자의 삶은 없는 것이네/ 길은 팔정도 진리는 사성제/ 욕망을 다스림에는 법이 최고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 길 뿐 다른 길은 없네이 시는 부처님이 45년 동안 전도를 마치시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면서 읊은 것이다. 우리도 매일의 삶을 팔정도를 생각하면서 되돌아봐야 한다.팔정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부처님과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와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께 45년의 전도를 마무리 짓고 쿠시나
갑자기 배가 아프다. 배가 아픈 사실이 고이다. 왜 배가 아픈지 원인을 생각해보니 아침에 냉장고에 들어있는 오래된 반찬을 먹었다. 그 반찬이 배 아픈 원인인 집이다. 약국에 가서 식중독 약을 사먹었더니 아픈 증상이 없어졌다. 식중독 약이 실천 방법인 도이며, 아픈 배가 나은 것이 해결된 상태인 멸인 것이다.사성제법인 고집멸도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고’의 원인인 ‘집’이 있고, ‘집’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고가 발생한다. 실천방법인 도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고가 해결된 상태인 멸이 생긴다.과제의 제시, 고고는
사성제는 우주의 진리가 불교 교리로 체계화 되는 과정을 밝히는 개념이다. 삶과 더불어 수행정진 속에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사성제다.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부처다’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시작해 보자. 그렇다면 내가 부처될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생활이 따라야 한다.부처가 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끊임없이 생각하고 되새길 것이바로 고·집·멸·도 ‘사성제’이다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여기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실천방법이 고·집·멸·도 사성제이다. 생활 속에서 어떻게 불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속성은 2600년 전에 부처님이 깨쳤던 무상이고 무아이다. 오늘 깨쳐도 무상이고 무아이며, 천년 후 깨쳐도 무상이고 무아이다. 기본적 속성이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되면서 불교의 출발점을 만들고 있다.무아와 무상은 본질적 진리무아·무상 인식하면 열반적정진리 알게 되면 고통 소멸하고즐거움 생겨 이고득락하게 된다제법무아(諸法無我)나라는 실체는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라고 내세울 실체가 아무것도 없다.그런데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를 하느냐하는 문제는 2600년 불
병원 동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이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도 많이 변하고 늙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존재의 본질은 무상이고 무아이다.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상태가 무명이며 무상과 무아를 아는 상태는 명이고 명은 연기이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존재인 것이다. 불교의 출발은 삼법인이다. 또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적인 속성도 삼법인이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상상해보자.어떤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판단·분별하는 ‘식’은 모
고등학교 시절 불교를 처음 알았을 당시 어느 토요일 경주 분황사에서 저녁을 먹고 예불을 올리게 되었다. 부처님께 예불을 올린 후 스님께서 축원하는 데 너무 황당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람과 동물과 모든 생명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축원 올리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정말 저 기도가 얼마나 모든 것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연기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인연과’에서 인을 끝없이 바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기 위해서 가치 기준을 낮춘 것처럼 보이지만 무아에 대한 인식에서 생기는 연민 때문에 상대방이 60
옆집 아줌마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사찰에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사찰에 가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라고 물었다.“불교, 부처님이 깨우친 것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그러자 다시 “불교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연기를 설하신 부처님께 이 목숨 거두어 돌아갑니다.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 생기고,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 없어지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자신이 바뀜으로 연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이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초기가 아니고 말기라는 것이다. 평생 잘 살았는데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하나? 억울해서 죽겠다.생명체는 성장을 하고 번식을 하고 또 자극을 주면 반응을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생물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포는 원형질과 후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질은 중심 부위에 핵이 있고 핵을 둘러싸고 있는 세포질 물질이 있다. 이 생명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신에 도전한 최초의 사람은 다윈이다.즉 생명의 진화론을 이야기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