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지금-여기’ 응시하기〉는 당신의 생애 끝에서 ‘지금 이 순간’을 조망해보는 글쓰기다. 탄생이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끝지점. 한 시간 후가 될지,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를 당신의 생애 끝 의식으로 ‘지금-여기’의 삶을 굽어보자는 제안이다.당신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모든 생명에게 죽음은 생애 가장 크고 특별한 사건이다.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았음은 물론 타인의 경험 또한 신뢰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죽음은 상황도 아니고 상태도 아니며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완전한 소멸
횡설수설(橫說竪說) 글쓰기‘횡설수설 글쓰기’는 여행으로 치면 ‘의도적인 길 잃기’다. 길을 걷는 사람이 의도치 않게 길을 잃으면 실종된다. 하지만 걷던 길을 의도적으로 버리면 ‘탐험’이 된다.언어의 활용 중 ‘횡설수설’은 사람 입에서 나온 노폐물 취급 받는다. 횡설수설은 취객의 씨불임이나 인지부조화의 언어, 호들갑 떨거나 깜짝 놀란 사람의 말 따위에서 볼 수 있다. 횡설수설은 말 그대로 ‘비루하고 못난 사람의 종잡을 수 없는 말’이니 어휘의 맥락이나 품격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의사전달의 절박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설사 그
21자 압축 일기〈21자 압축 일기〉는 당신의 하루를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정리해보자는 의도로 설계했다. 결코 21자를 넘겨서는 안 된다는 약속이 대전제다. 어쩌면 당신은 이 약속 때문에 유혹당했을지도 모르겠다. 21자 일기라니. 이 정도야 가뿐하지 뭐! 암, 그렇지. 이렇게 간결해야 해! 만약 당신 마음 안에 이런 말이 있다면 두 가지 무의식이 드러난 셈이다. 하나는, 그동안 일기쓰기를 소홀히 했음을 실토한 셈이고 또 하나는, 그래도 좀 뭔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TV나 온갖 모니터에서 터져 나오는 입말들이 이 시
나의 행복어 사전 만들기당신에게 행복은 소중한가? 무슨 엉뚱한 질문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당연히 행복하고 싶다. 그것도 길을 걷거나, 말을 하거나, 일을 하는 모든 순간 행복하고 싶다. 그래? 그렇다면 ‘모든 순간 행복하고 싶다’는 말을 곱씹어 보자. 뭔가 역설이 숨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당신이 원하는 만큼 행복하기 어렵다는 의미? 의 저자 데니스 프레이저(Dennis Prager)는 ‘인생의 소중한 것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듯이 행복 또한 예외는 아니다‘고 말한다. ‘나의 행복어 사전
나의 어느 날 사건, 취재수첩‘나의 어느 날 사건, 취재수첩’은 생애 기억할만한 기억의 카드를 찾는 일부터 시작이다. 크든 작든 내 사건 카드의 내용을 신문기사처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진술하는 작업이다. 비록 시골집 액자 속 색 바랜 사진 같은 사건들이긴 하다. 그 일의 효용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나의 어느 날 사건, 취재수첩’ 글쓰기를 한다면, 미처 몰랐던 나의 삶이 환하게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오늘 이 순간과 그 사건 사이에 뭔가 보이지 않는 끈이 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이
싫은 사람의 장단점 글쓰기살다보면, 별다른 이유 없이 ‘그 사람’이 싫을 때가 있다. 까닭 없는 눈물처럼 슬그머니 지우고 싶은 사람.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외면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 논쟁으로 인해 아예 꼴 보기 싫은 친구도 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만나면 둘도 없는 사이처럼 호들갑 떠는 관계도 있다. ‘나는 왜 싫어하면서도 싫다고 못하는 거지? 내가 싫어하는 거 맞긴 해?’‘싫은 사람의 장단점 찾기’는 그런 점에서 내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 제대로 살펴보자는 의도가 깔려
내 습관, 현미경으로 살피기내가 무심코 하는 언행(言行)은 대체로 ‘역사와 전통’이 있다. 노트북을 타이핑할 때 새끼손가락을 절대 쓰지 않거나, 아침에 바지를 입을 때 오른발부터 집어넣기, 젓가락이나 펜을 잡는 위치까지. 이런 동작은 아무리 서둘러도 별로 오차가 없다. 습관은 자신의 무의식이 토스트 기계에서 부지불식간에 튕겨 올라온 식빵 같은 사건이다. 내 안의 ‘게릴라’처럼 내면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행동이다. 생명의 최초 메커니즘인 호흡조차도 게릴라처럼 몰래몰래 자동적·습관적으로 출몰한다. 습관은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는
고백문 쓰기누구에겐가 고백해본 적 있는가. 고백은 억눌러놓은 비밀의 범람이거나 의도적 호출이다. ‘고백문 쓰기’는 내면의 언어 범람을 조절하는 ‘호수 만들기’와 같다. 내면의 어둠에 감금해뒀던 어떤 기억이 빛을 보게 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기억이나 경험을 감금해놓은 이유는 뭘까. 그것이 공개되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고 믿기 때문 아닐까. 내적인 위기도 위기지만 사회적, 인간적 탈락이 더 큰 위협일 것이다. 하지만 반전도 있다. 자신의 고백이 아닌, 타인의 고백을 듣는 것은 쾌감과 전율을 들깨운다. ‘너한테
징검다리 글쓰기징검다리 글쓰기는 ‘징검다리’라는 은유에서 알 수 있듯 두 발을 겨우 얹힐만한 크기의 돌덩이가 하천이나 강에 일렬로 이어져 있는 것과 같은 글쓰기를 말한다. 강을 건너려면 다른 대안은 없다. 강물에 듬성듬성 놓인 돌덩이를 따라 한발 한발 건널 수밖에. 당신의 생각이나 기억에 따라 첫 번째 징검다리, 두 번째 징검다리… 이렇게 하나씩 돌다리를 걷듯 적어가는 글쓰기다. 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칙센트 미하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몰입적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우리의 대표적 수행전통 중 하나는 화두수행[看話禪]이다
신과의 대화 글쓰기‘신과의 대화 글쓰기’라고 하니까 ‘흥! 신이 있기는 해?’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 경우를 들어 헛다리짚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神)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신탁을 내려주는 신이나 교회 첨탑 아래, 사찰의 대웅전 안에 계시는 그분이 아니다. 글쓰기명상에서 신이 계시는 처소를 굳이 말하자면 원고지나 노트북 모니터, 그 어느 지점인지 모를 곳이다. 아니, 그 안에서 부재중이어도 상관없다. 확인불가 조건에서도 우리는 신을 믿어왔거나 괜히 쌍심지를 켰거나 하소연을 했거나 이번 일만 잘 되면, 하고 긴급
선한 의지를 찾아서있기는 한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천사(天使)는, 없다. 어릴 적 동화 속에서는 그렇게나 흔했던 천사가 어른이 돼가는 동안 씨가 마른 게 아닐까. 천사 이야기는 내 생애 속에서 미확인 비행물체가 되었다. 천사의 존재를 믿었던 시절, 나는 미확인 비행물체도 믿었었다. 언젠가는 천사도 내 손으로 만져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천사는커녕, 천사를 믿었느니 마느니 하는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이제 천사는 아파트 1004호 현관에나 붙어서 어릴 적 꿈을 싱거운 우스개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너무 오래
내 안의 아기 드러내기조물주는 왜, 유아기의 기억을 어둠에 파묻었을까. 젖먹이 시절의 기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파편 같은 기억이라도 반딧불처럼 한 번씩 튕겨 오르면 좋으련만, 빛 없는 심해 그 자체다. 문제는 기억이 없다하여 그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당사자만 빼놓고 주변 인물들은 나의 그 시절을 턱없이 잘 기억한다. 단 몇 분 만에 전생에도 도달하는 최면 작업에 비하면 생애 4∽5세 시절 정도야 어제 일처럼 또렷해야 하지 않겠는가. 프로이드 심리학을 데려오지 않더라도 젖먹이 시절 삶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