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 거주했던 선비로 추정되는 학천산인(學泉散人) 정용익(鄭龍翊)은 초의와 교유했던 인물이다. 그가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해는 1845년 4월이다. 초의가 보낸 차를 받고 이에 대한 고마움과 안부를 편지에 담았다. 1844년 9월, 초의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하니 이들은 이미 알고 지낸 사이인 셈이다.전라 유생 정용익·최성간 서간“오래 못 봐 마음이 비루해져”초의 선사 향한 존경심 느껴져교류 시점·절기 등 상황 확인돼옛 선인의 서간, 미세사의 보고이번엔 두 편의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해남에 거주한 정용익의 편지를 살펴본
이용현(李容鉉)은 조선 후기의 인물로, 추사·초의와 교유했다. 그의 호는 반계(磐溪)다. 그의 행적은 일부분만 알려졌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니 〈순조실록〉15권, 1832년(순조 12년) 2월 29일 기사에 “전 선전관(宣傳官) 이용현(李容鉉), 의병장 송지렴(宋之廉) 등과 함께 윤제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들어갔는데, 회(灰) 2천여 석을 운반해 한쪽 편에다 쌓아 화살과 탄환을 막고, 겸하여 성을 넘을 사닥다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굴토군(堀土軍) 11명에게는 몸을 막을 수레를 만들어 주어 일시에 아울러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인물 황상(1788~1863)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기른 첫 제자 그룹에 속한다. 시에 밝았던 그가 스승에 대한 의리를 평생 잊지 않고 지킨 인물됨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그가 자신이 지은 시에서 골라 편집한 시 뭉치를 들고 추사 김정희(1786~1856) 형제를 찾아가 질정을 요청했던 사실은 〈완당선생전집〉 권6에 수록된 ‘치원시고후서(園詩藁後序)’에서 확인된 바이다. 그런데 〈완당선생전집〉에 수록한 ‘치원시고후서’는 원래 지었던 글보다 생략되었고, 이 사실은 초의 소장본 ‘치원시고후서’를 통해 밝혀진 셈
치원 황상(園 黃裳, 1788~1863)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강진 유배 시절 기른 첫 제자로, 시에 능했다. 학계에서는 그를 다산의 시학을 이은 인물이라 규정하였으니 이는 척박한 시대 환경을 학문으로 극복한 것이라 하겠다.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아전의 자제로 궁벽한 강진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오직 공부로 향상일로(向上一路)를 꿈꿨으니 실질적인 그의 버팀목은 다산이라는 시대의 거목이었다. 자질이나 공부에 대한 열의로는 충분히 동량(棟梁)이 될 조건을 갖췄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세상을 이롭
신위(申緯, 1769~1845)는 초의와 교유했던 인물로,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이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칭송받는 그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제자로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다.그가 1812년 주청사서장관으로, 연경을 방문할 때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을 만나 고담(古談)을 나눈다. 그가 옹방강을 만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전별시를 지어 조언했기 때문일 터다. 아무튼 그가 초의를 만난 것은 1831년 홍현주(洪顯周, 1793~1865)의 청량산방에서다.당시 신위는 홍현주의 부탁으로
초의의 명성이 경향에 알려진 것은 1830년경이다. 이 무렵 스승 완호의 탑명(塔銘)을 받기 위해 상경했던 초의는 추사 댁에 머물며 상경했던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추사 댁에 변고가 생긴 것. 바로 추사의 부친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유배되는 어려운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추사 댁에 머물지는 못했지만 세상사 새옹지마라.금령 박영보 지은 〈남다병서〉차에 대한 경화사족 이해 담아초의 이룩한 선차 복원 평가도스승 신위도 화답하는 시 지어師弟가 차 감상 후 茶詩 작성한·중·일 차문화사서 드문 사례홍현주(洪
시대마다 다르지만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1840년경 대흥사에서는 총섭첩 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1840년 3월 17일에 안국암 종정 우활(宇, 생몰연대 미상)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와 이 해 7월에 도내 승통 성활(性)이 초의에게 보낸 공문서는 바로 이 분쟁이 무엇 때문에 야기된 것이며 그 결말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표충사 주지 임명 문제로 다툼“예조 보고, 지난 내용과 달라”우활, 서간으로 초의 문제 제기성활 편지엔 우활과는 입장 차“처리말고 이관해 달라” 요구예
초의에게 유산 정학연(1783~1859)과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그의 행로에 중요한 의미를 던진 인물들이다. 무엇보다 유산은 다산의 장남으로 초의와는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강학하던 시절에 인연을 맺었고, 초의가 추사를 만난 것은 유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초의의 막후 후원 세력이라는 점이며 이들이 차와 사를 통해 오랫동안 교유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이뿐 아니라 초의는 이들의 자제들과도 막역한 교유를 이어갔는데, 그 매개물이 차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초의는 자신이 만든 차를 통해 선비들의
조선 후기 여항시사를 이끌었던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초의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원래 그의 집안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조부 때부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여항인(閭巷人)들과 어울린 화가이기에 중인 그룹으로 분류한다. 그의 자는 이견(而見), 치운(致雲)이요, 우봉(又峰), 철적(鐵), 호산(壺山), 단로(丹老), 매수(梅) 등을 사용했다. 마치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훨훨 날아가듯이 길을 걸어 다녔다”고 할 정도로 병약했다고 한다. 이런 약골임에도 천수를 누렸던 그는 특히 매화를 좋아하여 기벽
금령 박영보(1808~1872)는 박문수의 손자이다. 신위의 제자이며 한때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초의를 처음 만난 것은 1830년경이다.이산중이 얻은 초의차를 박영보에게 나누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초의의 명성을 알게 된다. 그가 초의차를 맛본 후 쓴 것이 〈남다병서〉이다. 신위는 이 시에 화답하여 〈남다시병서〉를 쓰기도 하였다.이번에 소개할 글은 바로 박영보가 초의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첩으로 묶어 보낸 시첩이다. 이는 그가 초의와의 교유를 증표하기 위한 것인데 시첩크기는 21.5×13.5cm이며 1830년에 지은
오랜 세월동안 편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소통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편지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아마 소통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하다.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편지를 쓰는 일이 적어진 걸 보면 편지란 이미 사라져가는 소통 수단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작금의 현실은 더욱 손 편지의 의미가 희미해져간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원초적 정서를 일깨워준다. 특히 이들의 성의를 다한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따뜻한 정감이 전해지는 듯 한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생략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이런 편지들도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기에 발신자가 생략된 2통의 편지를 소개한다.먼저 소개하려는 편지에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편지의 내용에서는 발신자가 처한 정황이나 글씨체를 통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추정할 정보가 숨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간명한 정보는 편지의 말미에 수록한 내용으로 보낸 이를 추정할 수 있다.편지 내용서 친밀한 교분 확인山人 칭한 편지, 글 수준 높아학문적 식견 높은 유학자 추정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