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가 길어지면 깨달음도 깊어질까? 가을 깊어 겨울로 이어지듯, 그렇게 조용한 깨달음과 평화에 이르게 될까? 메마른 이마를 유리창에 기대고 내려다 보는 12월의 거리에 하얀 눈이 내린다. 나뭇가지를 떠나 땅에 떨어지고도 여전히 붉은 낙엽 위로 쌓이는 눈꽃으로 인해, 차마 놓지 못하던 가을을 접고 겨울이 피어난다. 어쩌면 겨울은 첫 눈과 함께 시작된다. 겨울풍경 관한 최초 풍경화세계 대한 통찰·관념 보여사계 순환의 ‘다시보기’ 작업‘이 곳이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 /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 / 내가
17세기 네덜란드 대가인 렘브란트 반 린(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은 생애를 통틀어 유화, 동판화, 드로잉 등을 비롯한 천 수백여 점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 〈니콜라스 툴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와 같은 작품으로 그는 당대에 이미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돌아온 탕자’는 자화상 같아회개와 신에게의 귀의 의미본질적 자아의 깨달음 추구또한 렘브란트는 전 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나 전기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
전통적인 회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풍경, 사람 등의 시각적인 대상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인 반면, 서예는 언어라는 부호로서의 목적을 가진 기호들을 조형적 예술미를 담아 그려내는 행위이다. 서예는 의미 전달의 시각적 매개인 문자를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추상적 성격을 지니며, 또 문자가 가진 실용적 기능을 넘어서 심미성을 추구하기에 예술적 가치를 아우른다. 현대 서구 회화에서도 서예의 이러한 미적 특질을 그들의 작품 세계에 차용한 작가들이 적지 않다.필선의 강약으로 공간을 표현화면 중심·경계의 서열 해체상호
강 건너편 마을이 구름 사이로 내리는 아침 볕 속에서 기지개를 켠다. 드문드문 금빛 햇살을 머금은 흰 구름은 빨간 지붕들과 교회의 첨탑을 쓰다듬듯 나직하게 깔려 있다. 물 가에 아직 떠나지 않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잔잔한 바람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수면은 하늘의 미묘한 음영과 도시의 실루엣을 보듬어 안고 유유히 흐른다. 이편 기슭에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선착장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교회의 첨탑에 자그마하게 보이는 시계바늘은 아침 7시가 막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시간이 멈춘듯한 감도는 정적빛과 어둠
잔잔한 연못에 비친 파란 하늘과 물결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문득 삶에 대한 작은 경이감을 불러 일으키듯, 어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물의 심상은 때로는 인간의 내면에 깃든 정서를 일깨운다. 물은 생명과 창조의 근원적 상징이며 시간의 흐름, 변화와 사멸 그리고 부활과 재생의 메타포이다.커다란 화폭에 물이 흘러내린다. 어두운 배경에서 돌출된 빛나는 흰 물줄기는 무언가에 부딪쳐 무수한 포말과 물방울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마치 화폭을 벗어나 아래로 끝없이 떨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평면인 화폭에서 공간감을 자아내는 기법은 전통적으로는
손의 인상은 우연한 순간에 홀연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것은 오래도록 존재해 왔으나, 의식의 여백 어딘가에 밀쳐져 있다. 어느 순간 작은 섬광처럼 인지의 영역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낯선 방문객과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할 때 시선은 가장 먼저 얼굴로 향한다. 시간이 흐르고 짧지 않은 대화의 한 모퉁이에서 시선의 언저리에 무심히 방치되어 있던 손은 의도하지 않았던 시점에, 불현듯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현대 미술에서는 굳이 예술가가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작품을 제작할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예술가의 손은
이 그림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조금 전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먹이를 찾아 선회하며 날던 갈매기 떼의 울음소리마저 잦아든, 어느 연안의 조용한 뱃전에서 어두운 바다 물결을 바라보는 듯하다.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 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어느 시인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종이에 그려진 크지 않은 이 그림에서 사람들은 가없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 일렁이는 검은 물결, 깊어지는 어둠과 고요 그리고 물결과 마주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한다.사진촬영에 밀린 현대 리얼리즘 사조내면 의식
긴 머리칼을 뒤로 묶은 한 청년과 그의 동료들이 수많은 흙 포대를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그 흙은 마침내 티벳 망명정부가 있는 북인도 다람살라의 한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농구장 크기만한 네모꼴로 그 옮겨진 흙들이 정성스럽게 깔렸다.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승려들도 합장을 한 채 줄지어 조용히 걸어왔다. 어린 아이들은 생소한 정경을 보며 신기한 듯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는다.세월의 흔적이 주름으로 깊게 패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꿇어앉아 연신 흙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한다. 한 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쭈그리고 않
형상의 실루엣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인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형태를 구성하는 것들은 수많은 다양한 색채의 작은 스티커들이다. 이것은 작가가 전세계에서 모은 것들인데 여기에는 미키마우스, 팅커벨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회정치적이면서도 극소수 컬트적 숭배의 대상이기도 한 체 게바라, 오사마 빈 라덴 등도 있고 맥도널드, KFC, IKEA 같은 회사의 스티커나 모택동, 오바마와 같은 정치인의 이름들도 보인다.
단순한 사물로 볼 때는 설명이 전혀 필요치 않은 물건이지만, 이것을 하나의 미술품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 있다. 프랑스 태생의 작가 마르셀 뒤샹(Henri-Robert-Marcel Duchamp, 1887-1968)의 〈샘 Fountain, 1917〉이다. 남성용 소변기를 방향만 바꾸어 전시해 놓고 그 테두리에 R.Mutt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이 서명되어 있다. 사실 Mutt는 그 당시 위생 설비 제조업체였던 ‘Mott Iron Work’라는 회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뒤샹은 원래 이 이름을 생각했다가 사람들
하얀 연꽃 위로 눈부시게 밝은 빛 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그 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 아기와 탯줄로 이어진 모태는 황금빛으로 온 연못을 비추며 빛을 발산하고 있다. 물 위를 뒤덮으며 떠 있는 수련의 잎들은 저 멀리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짙은 어둠, 그 적멸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아기의 형상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신비하고 거룩한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서구서 흔히 연꽃 이미지는 창조와, 여성성, 그리고 성적인 결합과 연관되었으나, 이 그림에서는 연꽃이 생명의 기원,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다.동양미술에 대한 관심초현실주의
직육면체의 크지 않은 돌조각. 전체 덩어리를 수직으로 반분하는 단면은 이 남녀가 각자 분리된 존재임을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수평의 완만한 선으로 묘사된 두 팔은 서로를 감싸 안고 있으며, 분리된 좌우의 매스는 딱 한 부분 입맞춤하는 남녀의 입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두 눈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나 마치 하나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전체의 형상은 두 인물의 인체의 사실적인 윤곽을 따르기보다는 두 대상이 마치 하나로 합쳐진 듯한 직육면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브랑쿠시의 〈입맞춤(The Kiss)〉이다.조각가 브랑쿠
일망무제의 구름 바다에 연화좌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돌아 앉은 스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정갈하게 삭발한 머리와 마른 어깨 위에 걸친 청회색빛 장삼에서 평생 고행하며 수행한 선승의 기품이 전해온다. 구름 바다의 굽이치는 동세는 마치 백팔번뇌에 얽혀 고통 받는 중생의 삶을 형상화한 듯한데, 연좌에 앉은 스님의 모습은 미동 없는 바위처럼 고요하다. 마치 그 모습이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한 점 티끌 없이 청정한 연꽃이다.단원·함메르쇠이·릴케 공통점인간 내면의 진솔한 모습 다뤄스님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후광은 주변이 좀더 짙은 청회색으로 강조
작품 〈고성소(古聖所)에로의 하강 Descent into Limbo〉 앞에 서면 시각적으로, 도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평평하고 견고한 전시실의 바닥에 알 수 없는 둥글고 검은 구멍이 놓여 있을 뿐,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제 이 작품의 안쪽 깊이는 2.5m라고 하지만 내부는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검은 도료로 칠해져 있어 보는 이들은 그 깊이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최근에 포르투갈의 한 전시회에서는 이 작품을 단순히 검은 색을 칠한 원으로 오인한 관람객이 발을 딛다가 그 속으로 빠지는 해프닝이
사소한 일상사 다룬 그림지속과 소멸, 고통과 행복사이의 삶과 고뇌를 조명한 순간,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고르게 만드는 그림이다. 비눗방울 놀이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소년이 두터운 벽돌 난간에 기대어 긴 대롱으로 비누 거품을 불고 있다. 오른 팔꿈치 옆에는 비눗물이 든 작은 유리 컵이 놓여져 있고 소년의 머리는 가지런히 묶여 뒤로 넘겨져 있다. 대롱을 쥔 오른손과 이마에는 밝은 빛이 부서져 내려 어둡게 칠해진 벽돌 난간과는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그림의 오른편에서는 모자를 쓴 작은 꼬마가 비누 거품을 지켜보기 위해서
광대무변 우주와 인간의 왜소함텅빈 여백 속의 확장성 묘사바다 바라보는 향일암과 동일해세상의 사물들은 저마다의 존재방식을 가진다. 동백꽃이 질 때는 꽃송이 채 느닷없이 툭 떨어진다. 동백은 꽃잎 하나하나가 일일이 바람에 흩날리며 지는 여느 꽃나무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가는 봄날의 아쉬움을 더한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향일암 가는 길을 서둘렀으나 구름과 안개가 짙어 아침 해는 보지 못했고, 바위 여기저기에 떨어진 동백꽃들만 붉었다.해돋이가 아름다운 바닷가 바위산 조그만 암자인 향일암. 옛 책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시
곤함을 달래며 일어난 한밤중의 산사는 어둡고 추웠다. 시계는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톱 같은 달이 검은 하늘에 걸려 있는데, 극락보전 앞을 지나칠 때는 잠도 제대로 깨지 못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지금부터 새벽까지 그리고 다시 해거름에 이를 때까지 봉정암에 가야 한다. 우연한 기회에 도반의 소개로 계획을 잡긴 했으나 며칠간 여러 바쁜 약속들 때문에 백담사 가는 전날 밤까지도 밀린 일을 처리해야 했다.반복적인 걷기로 남기는 흔적자기와의 대화와도 맞닿아고요의 숨결 느끼는 수행현장성철 큰스님은 자신을 친견
몇 년 전, 한·중·일 미학자들의 국제학회가 한국서 열렸다. 그 프로그램 중 일부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전시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문답(問答, dialog)’이라는 제목의 설치 작업이었다.천정이 높은 전시 공간 내부의 한쪽 벽에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가져 온 전체 1,222×491.8cm, 화면 1,127×456.2cm, 무게 84.5kg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의 보물 제1350호 통도사석가여래괘불탱(通度寺釋迦如來掛佛幀)이 걸려있고, 건너편 벽에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료안지를 찾아 나선 아침은 고요하고 심심했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1352)가 쓴 수필집 2백44단의 절제된 표현과 함축적인 글 속에는, 칼날 번뜩이는 전국시대를 살았던 일본 중세인들의 인생무상 정신과 자연, 인생, 생활, 학문, 정치, 예능, 풍속 등 다채로운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첫 머리로 시작하는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는 일본 고전 중에서도 가장 멋있는 서두라고 알려져 있다. 료안지(용안사, 龍安寺)는 일본 불교 임제종의 사찰이다. 일본 임제종은 간화선 수행을 중시하는 점이 우리
누군가 백남준에게 물었다. “선생님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뭡니까?” 백남준의 대답이 걸작이다. “메시지는 뭔 메시지...메시지를 전하려면 말로 하지, 그걸 왜 어렵게 작품으로 합니까? 나는 메시지 전달엔 흥미 없고, 또 돈 많은 헐리우드 영화업자에게 당할 재간 없지요.” 그는 서양 아방가르드 흐름에는 공(空)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자주 언급했다. 한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존 케이지의 전위음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 난해하고...더구나 자주 접해보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관객들은 난해하게 여길 터인데 존 케이지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