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련화 보시와 재벌 후원 콜라보안국동에서 경복궁을 향해 걷다가 동십자각을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삼청동 쪽으로 가다 보면 법련사가 있다. 이곳은 1973년 11월 김부전(법련화) 보살이 종로구 사간동의 대지와 건물을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로 희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재벌의 후원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하였다.1922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김부전은 1940년 금강산 정양사에서 설법을 듣고 발심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거처를 옮긴 그녀는 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서울 도봉산에 불교양로원을 설립하였고, 1953년에는
대원각과 길상화 보살어느 시인이 표현하였듯 성북동 비둘기는 채석장 소리에 놀라 그곳을 떠났고, 인간은 그 공간에 큰집을 세웠다. 그런 집들 사이로 절인 듯 절이 아닌 듯 들어선 사찰이 있다. 10년 전까지 법정스님이 회주로 있던 길상사이다.이곳은 처음부터 사찰로 지어진 것이 아니어서 일반 한옥풍이다. 사찰로 변모하기 전까지 매일 밤 음주가무가 질펀하게 열렸던 요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이권을 쫓아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인간의 탐욕이 사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이익과 출세를 위한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서로의 의리를
1. 조계사 이전의 모습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조계사의 현주소이다. 이곳은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알고 있다. 지리적인 위치도 위치이지만 조계사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기도하면 위안을 얻는다. 주변의 직장인은 점심식사 후 이곳을 거닐며 업무에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 요즘은 외국인들의 방문도 많아졌다. 시내에서 접근성이 수월한 전통사찰이기 때문이다.불교혁신으로 총본산 건립 추진해‘조선불교 선교양종 총본산 각황사’태고사 사명변경 후 조계사로 탄생
요즘 한일관계가 좋지 않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 배상에 관한 한국 대법원 판결에서 시작된 양국의 갈등이 무역, 안보, 그리고 불매운동까지 전방위로 퍼지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상황까지 겹쳐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설법·강연·안거수행 등전통방식으로 종풍 유지범행단 통해 실천도 담보이런 갈등의 원인은 한 세기 전 일제의 한국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36년간의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모든 분야에서 통제와 수탈이 행해졌다. 그런 식민지 정책에 한국불교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오히려 일제는 양국이 공동으
용성의 대각사 창건창덕궁 돈화문에서 종로 3가 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왼쪽 상가건물 뒤로 기와지붕의 처마가 살포시 드러난다. 이곳이 종로 봉익동으로 이 곳에는 용성 선사가 세운 대각사가 있다. 대각사는 여느 도량처럼 넓은 마당과 고풍스런 당우는 없다. 주변 지역 역시 상가와 민가가 밀집한 탓으로 숲과 어우러진 사찰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도심 한복판에 사찰이 존재하는 것 같은 어색함마저 있지만 대각사는 대일 항쟁의 산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이곳에서 한용운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하였
삼각산 화계사 뒤편으로 낮은 언덕을 넘으면 삼성암이 나온다. 삼성, 즉 독성, 산신, 칠성을 모신 곳이다. 1943년에 쓴 김태흡의 〈화계사 삼성암 중건기〉에 1872년 창건되었다 하니 아직 150년이 못된 연혁이다. 그렇지만 독성기도로 가피를 받은 불자들이 많아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함께 중요한 나한도량으로 꼽히는 곳이다. 중건기 제목을 보면 창건 당시 화계사 산내 암자였던 것으로 보인다.조선후기 거사신행활동 활발고종 9년 묘련사 결사 거행“내세적 구원사상 사회 전개”거사에 의해 창건된 삼성암삼성암의 가장
영도사에서 개운사로개운사 홈페이지에 있는 사찰연혁을 보면 창건 당시 사명은 영도사(永導寺)였고, 위치는 지금 고려대 이공대 캠퍼스에 있는 인명원(仁明園) 자리였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가 죽자 이곳에 묻혔다. 왕실에 자리를 내준 영도사는 인파 축홍(人波竺洪)이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적고 있다.지금 표지석이 있는 인명원 자리를 놓고 볼 때 그곳이 실제 영도사 자리였는지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인명원을 들린 정조의 표현 때문이다. 1779년(정조 3) 8월 10일 이곳에 들
화계사의 개화승 차홍식서울의 많은 사찰 가운데 일찍부터 세계화에 눈뜬 곳이 있다. 그곳이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이다. 이곳 역시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다. 창건과 중창 때 왕실의 도움이 컸다. 근대에 들어서 1880년 11월 完和君 李獻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상궁 千氏 등이 화계사에 佛糧을 시주하는가 하면, 대왕대비 趙氏는 翼宗과 憲宗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계사 명부전에 불량토를 헌납하였다. 대비는 이후 1883년 12월 관음전에 佛糧을 시주하는 관심이 많았다. 이런 왕실과의 인연은 1866년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할 때
영조의 첫째 손자 의소경복궁 서쪽 사직단을 거쳐 사직터널을 지나면 독립문역이 나온다.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에서 비롯된 역명이다. 이 문은 1884년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1897년 11월에 세웠다. 중국사신을 환영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서구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염원의 표현이었다.그곳에서 금화터널을 넘어 고가 밑에서 오른쪽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봉원사가 나온다. 봉원사의 창건 연원은 제법 오래되었지만 사격이 커진 것은 조
견성사(見性寺)서 봉은사로조선 초 태종과 세종으로 이어진 배불정책은 세조에 이르러 잠시 멈췄다. 덕분에 조선불교는 숨 돌릴 수 있었으나 성종 이후 다시 배불로 치달으며 암울해 졌다. 내불당이 궁 밖으로 옮겨지고 도성 안 비구니 사찰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사대부 여자의 출가가 금지되었다. 친히 국정을 다스린 이후에는 일체의 사찰을 창건하지 못하게 했으며, 옛터에 다시 중창하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불교에 불리한 조항이 다수 수록되었다.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 역시 불교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성종의
백련산 정토사와 왕실 인연서대문구 안산을 이어 은평구 녹번동 쪽으로 백련산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찰이 백련사이다. 백련사 옛 이름은 정토사(淨土寺)였다. 도성 서쪽에 위치한 탓에 일찍부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정토신앙으로 유명하였다. 한때 서울에 사는 불자들 사이에서 이곳에 다녀와야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만큼 이름이 높았다.백련산은 산세가 높지 않으면서 숲이 좋았다. 조선의 임금들은 궁궐에서 멀지 않은 이곳으로 사냥을 나와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곤 하였다. 성종은 18년(1487) 3월 19일
원찰을 금지한 조선세종은 즉위 2년 7월 10일 어머니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산릉 옆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를 상왕에게 묻자 11일 병조 참의 윤회를 세종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이 전했다.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원찰 예종 원찰 ‘정인사’로 명명1900년 고종 ‘수국사’도 중창“조선에 이르러 개경사 연경사가 있어 대비의 능에도 사찰을 지을 수 있으나 나는 절을 짓지 않고 법석도 역시 개설하지 아니하여, 이로부터 법을 세우려 한다.”난감해진 세종은 윤회를 상왕에게 보내 불교의 폐단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능소를 모신 후 빈 골짜기가
조선조 후궁과 정업원왕조시대 임금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갔다. 먹고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재가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왕실에서 마련해준 거처에서 조용히 지내는 일뿐이었다.그들 가운데 혼자 지내느니 부처님을 섬기며 지내겠다고 출가를 선택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곳이 정업원이었다. 지체 높았던 그들이 머물렀던 곳이어서 이곳의 주지 역시 남달랐다. 태종 8년 2월에 공민왕(恭愍王)의 후궁이었던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비(惠妃)가 정업원에 머물다 죽었다. 그러자 왕자의 난으로 희생
신덕왕후 원찰로 건립된 흥천사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姜氏)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은 즉위 한 해 전 죽었고, 둘째 부인만이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강씨는 건국이란 힘든 시기를 함께 한 까닭에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4년 만인 태조 5년(1396) 8월에 죽었다. 조강지처를 잃은 태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능을 경복궁 서남쪽 가까이 조성하고 묘호를 정릉(貞陵)이라 하였다.태조는 왕비의 극락왕생을 위한 원찰을 창건하였다. 그것이 흥천사이다
세종의 승가사 약사기도조선 제4대 임금 세종.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하여 여론 조사에서 늘 상위권에 오르는 인물이다. 그가 보여준 치세를 보면 태평성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현대에도 만 원의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어서 사람들의 애정이 식을 줄 모른다.그런 세종은 처음부터 임금이 될 위치가 아니었다. 셋째인 까닭에 멀어도 한참 먼 위치였다. 그런데 첫째 양녕의 일탈이 문제가 되어 세자에서 물러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둘째 효령이 있었다. 태종은 둘째와 셋째를 놓고 고민하다 셋째를 세자로 택했다. 술 한 잔 못하는 효령보다 사신이
망월사 서쪽 편 기슭에 혜거탑(慧炬塔)이 있다. 이 탑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인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10세기 경기도 갈양사(葛陽寺)에 있던 혜거국사(惠居國師)의 존재도 한 몫 하였다. 갈양사는 지금 용주사의 옛 이름이다.2017년 10월 천 년의 비밀이 벗겨졌다. 서울 도봉서원(道峯書院) 하층 발굴현장에서 영국사 혜거국사 비 일부가 발굴된 것이다. 비편은 길이 62㎝, 폭 52㎝, 두께 20㎝ 정도였다. 발굴된 비편에 새겨진 글자는 281개인데 256자 정도가 판독할 수 있었다. 이 비편의 발굴
한국불교의 중흥조 태고 보우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의 전문과 제1조를 보면 태고 보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종조 도의국사께서 조계의 정통법인을 사승하사 가지영역에서 종당을 게양하심으로부터 구산문이 열개하고 오교파가 병립하여 선풍교학이 근역에 미만하였더니 여조의 쇠미와 함께 교세가 부진하려 할 새 태고국사께서 제종을 포할하사 조계의 단일종을 공칭하시니 이는 아국불교의 특색이다.”“제1조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
한양 천도와 흥복사(興福寺)서울 성동구에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있다. 한자를 풀어보면 십리를 더 가라는 뜻이다. 도성을 세울만한 곳을 찾으라는 태조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전국을 살펴보았다. 이곳에 이르러 도성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고 기뻐하였다. 그러자 그곳에서 땅을 갈고 있던 노인이 게으름 피는 소에게 무학같이 어리석다고 책망하였다. 의아해하는 무학에게 십리를 더 가면 궁을 세울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헤맨다고 일러주면서 사라졌다. 무학이 그 말을 듣고 십리를 가니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도달했다고 한다.조선시대
불교의 문수보살불교에서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보좌하는 상수보살이다. 대승불교 이후 궁극적 목표가 중생의 지혜 증득에 있음을 시사하면서 등장하였다. 손에 쥐고 있는 이검(利劍)은 지혜를 상징한다. 세상의 복잡한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찾는 선지식이다.인도의 문수보살 신앙을 보면 다섯 봉우리의 산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며 그 명호를 지성 칭념하면 그 공덕이 수승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믿음이 티베트, 중앙아시아로 전해져 많은 영험 사례를 만들어 냈다. 이어 중국으로 전해진 문수신앙은 동진(東晋) 이후 점점 발전하면서 당나라 때 절정을 이르
연재를 시작하며, 서울의 불교문화경주와 개성 그리고 서울은 왕조의 수도였다. 그런 인연으로 어느 곳보다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가장 풍성한 곳은 경주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불교박물관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역시 많은 불교문화가 존재하지만 갈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한다. 두 곳과 비교할 수 없지만 조선의 수도 한양 역시 제법 많은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서울에 현존하는 사찰은 어림잡아도 수백 곳이 넘는다. 곳곳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 대상이 많으면 선택해야 한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