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본지의 부처님오신날 봉축특집호 기획기사인 ‘유기동물과 불교’를 잘 읽었다는 독자였다. 나이가 지긋할 것 같은 목소리의 독자께서는 비구니 청솔 스님이 홀로 운영하는 경남 사천의 견공선원(청솔아토유기견묘쉼터) 연락처를 물어봤다. 기사를 읽고 강아지를 입양하고픈 마음에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독자 덕분에 견공선원을 취재한지 약 두 달 정도 지나 다시 청솔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님에게 입양을 문의한 독자 연락처를 전달하면서 보도 이후 견공선원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묻자
견공선원(犬公禪院). 평소 개와 고양이를 비롯해 동물을 좋아하는 기자에게 매우 독특한 절 이름이 뇌리에 ‘콕’ 박혔다. 우연히 TV프로그램을 보다 알게 된 그곳, 80여 마리의 유기견과 유기묘들이 비구니스님과 살아가는 견공선원(청솔아토유기견묘쉼터)이다. ‘세상에, 스님과 유기견이 무슨 인연이기에 절 이름까지 견공선원이란 말인가?’지금껏 능력이 부족해 소위 ‘랜선집사’로 온라인에서 남의 집 반려동물만 구경해온 기자에게 견공선원은 마치 영화 쥬만지(Jumanji) 속 매력적인 정글처럼 느껴졌다. ‘한번 가보고 싶다.’ 작은 소망은 오래
모든 생명은 나고 죽는다. 산 생명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평등한 진리다. 그렇기에 나고 죽는 것은 순리일 뿐 장애가 아니다. 다만 나고 죽는 것 사이에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의 문제다. 부처님이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중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수많은 반려동물들이 길거리에 버려진다. 매우 소중한 짝을 뜻하는 반려(伴侶)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용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애완(愛玩)’의 개념이다. 가까이 두고 즐기다가 싫증나면 버리는 장난감 같은. 명절 연휴만 되면 ‘명절증후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