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 때문에 부탄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다녀온 평론가 이형권 교수님과 차를 마실 때였다. 다소 까매지고 마른 모습을 뵈니 말 못할 고생이 많으셨던 것 같았다. “잘 돌아오셔서 다행이다. 다음에는 좀 더 편한 곳을 다녀오시면 좋겠다”고 하니 막상 교수님은 뜻밖에 대답을 꺼냈다. “될 수 있으면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행복지수 세계 1위 국가의 매력이 어땠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교수님은 사랑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허공을 부드럽게 응시하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교수님은 “승려나 학자, 노동자 누구를 만나더라도 모두 행복한 모습뿐이었는데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웃을 준비가 된 것 같다”고 하셨다. ‘웃을 준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과연 우리를 보고 선뜻 그런 표현을 해 줄 수
어느 남자 어르신을 상담할 때였다. 고된 노동으로 평생을 보내셨고 떨어져 사는 가족들과 사이도 좋지 않은 분이셨는데, 신세한탄을 하시다가 느닷없이 자기 상황에서 어찌하면 좋을지 똑 떨어지게 답해달라며 졸랐다.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고 말을 돌리니 그만 화가 폭발하셨다. “이게 무슨 상담이냐. 원 이거 해서 밥이나 먹는 놈인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시는데 여간 당황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이란 거울 같은 것. 차분히 이해시키고 달래드리니 조금씩 화가 누그러져갔다. 찔끔찔끔 눈물을 쏟고 이런 저런 후회를 하며 해묵은 감정들을 묶고 풀기 여러 번, 그러다가 문득 한마디를 하셨다. “그래도 나 착한 늙은이여, 마누라는 그래도 나 오래 살기 바랄거야.” 패인 주름 사이로 빛나는 눈빛을 비롯해 그 분의 첫 표정
순간의 실수나 잘못된 판단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 수용자들. 그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고, 삶의 희망을 느낄 수 있도록 교도소와 구치소 수용자를 위해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전법활동과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그 인연은 직장생활 교육시간에 삼중 스님의 사형수 교화사례를 감동 깊게 들으면서부터였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교화를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이 실제로 이뤄졌다. 교정위원으로서 수용자들이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는 것을 볼 때 큰 자긍심도 느낀다. 한 번은 대만 성지순례에서 대만불자들의 봉사하는 생활상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특정 기관에 봉사자리가 없어 1년을 기다리기도 했다. 봉사기회가 주어진 다음에는 직접 도시락을 싸들고 활동비를 내면서까지 마음을 다해 봉사했다. 오직 봉사를 위해 살아가
11살,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 대인기피증과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아이를 만난 건 6월 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선생님은 몇 살이에요?” 침울한 얼굴로 만나자마자 당돌한 질문을 한다. “내 나이가 궁금하니? 한번 맞혀볼래?” 그러자 아이는 나의 말은 아랑곳 않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가족의 나이를 무심히 흘리듯 외었다. 자기가 11살, 엄마는 몇 살, 아빠는 몇 살, 동생은 몇 살, 할머니는 63살…. ‘대인기피증이라더니 뭐가 문제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침착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잘해보자.” 아이는 갑자기 손을 움츠려 뒤로 감추며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아, 미안! 손잡기가 싫은가보네.” 이렇게 시작된 아이와의 만남
지난여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인연들을 위해 배를 타고 사고해역 근처로 나가 법회를 본 날이다. 지금껏 기억에 또 기억을 더했지만, 지금부터는 하나씩 덜어내 본다. ‘기억의 무게로 인해 물속에 잠긴 배가 뜨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 이후, 수많은 이들의 무지와 탐욕으로 가라앉은 배이기에 조속히 해결되길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도 혹시나 욕심으로 바뀌어 무게를 더하지는 않을까 염려됐다. 사실 이런 마음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실이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사고해역에서 열리는 해상법회는 처음이다. 인양작업에 관심과 힘이 되기 위해 팽목항에서 스무 명 정도 탈 수 있는 배를 빌렸다. 처음엔 더 많은 이들이 타려했지만, “규정입니다”라는 해경의 말을 듣고 나머지 인원은 마음만 싣기로 했다. ‘그래, 세
“스님, 오늘은 바깥이 아니고 실내입니다.” 그동안 조계종 사회노동실천위원회가 출범한 후 대부분의 활동은 현장 내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불교계를 비롯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실천위원스님들의 이름과 얼굴, 활동내용들이 공개되었다. 그러자 이런 활동을 긍정하고 응원하는 목소리보다 ‘스님들이 정치적으로 뭐하느냐?’부터 ‘보여주기식 이벤트 좀 그만하고 본분으로 돌아가세요!’ ‘결국 되지도 않을 것인데 너무 애쓰지 마세요…’ 등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실천위원스님들은 각종 이익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소도 불사하기에 자칫하면 위원회 활동이 특정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또 그 일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는 무관심한 이들이나 특정 배타적 타종교인들은 미간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따르릉~.” 정적을 흔드는 전화벨소리에 나른한 오후의 단잠에서 깨어났다. “내일모레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법회가 있는데, 그때 법고(法鼓)를 울려줄 수 있으신가요?” 법고를 야외에서 울리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상 쉽진 않지만 이런 현장에 법고가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해보기로 결정했다. 길 위로 옮겨진 법고를 법고대에 올리니 어른 키만큼이나 솟은 모양이 참 늠름하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 위치한 위안부 동상 옆에 나란히 놓으니 가냘픈 소녀상 머리 위를 법고 그늘이 살짝 덮는다. 아는지 모르는지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주겠다는 법고의 따뜻한 마음 아닐까? 법고를 울리기 전 개인적으로 항상 하는 의식(?)이 있다. 일명 ‘문성의식(聞性儀式)’이다. 바로 법고 울리는 곳의
2016년을 시작으로 조계종 사회노동 실천위원으로 위촉된 스무 분 스님들의 첫인사는 지난 겨울 차가운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노동개혁안,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 그동안 뉴스에서 간간히 볼 수 있었던 사회적 이슈를 적은 플래카드들이 서울시청광장에 휘날리고 있었다. 엄청난 군중과 고함소리, 결사적인 눈빛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분노의 울부짖음은 시청역 출구를 막 나온 두 발을 잠시 묶어두었다. “스님도 이런 곳에 오셨어요?” 지나가는 거사님 한 분의 질문에 정신을 가다듬고 멋지게 자기소개를 하려는 순간, “스님은 절에서 수행 하시는 분 아닌가요?” “이런 곳에 오셔도 되나요?” “저리 비키세요!” 등 많은 말을 들으며 거친 손에 두루마기 자락이
병원포교 원력을 세우고 병원을 법당삼아 수행한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감회가 새롭지만 그 과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다. 첫 시작은 작은 사명감 하나였다. “스님, 죄송합니다. 저는 더 이상 불자가 아닙니다.” 평생을 불자로 정진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병상에서 개종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자세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분도 얼마큼 고심했겠는가. 아마도 불교가 싫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플 때 그토록 믿어왔던 종교가 주변에 없다는 게 안타까워서가 아닐까 싶다. 이때 병상에 있는 불자들에게 하루바삐 부처님의 자비를 전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수많은 우여곡절의 한가운데서 예상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는 일이 있었지만 난감하면서도 감사한 기억은 첫 봉축법회 피아노 사건이다. 당시
경찰병원에는 경찰가족과 젊은 의경들이 많이 입원해 있다. 그 중에서 오래 전에 입원했던 한 전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 청년은 의식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경과가 호전되면서 일반병실로 옮겨왔다. 병실을 순회하다가 만난 그는 시위를 진압하다 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청년이 휠체어를 타고 병원법당을 찾아왔다. 그는 차를 한 잔 마시면서 큰 아픔을 겪게 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스님, 저는 앞으로 하반신 불구 장애인으로 살 것 같습니다. 의사선생님 소견이 그렇거든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듭니다.”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해요. 우리 모두는 자기 근본인 불성을 갖고 있어요.
어느 날 조용히 병원법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자신을 한 환자의 언니라고 소개했다. “스님, 제 여동생이 말기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기도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렇군요. 얼른 가십시다.” 병실에서 결코 멀지 않은 법당이지만 언니가 이곳을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나는 주저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와 함께 병실을 찾아갔다. 언니의 안내를 따라 병실에 들어가니 침상에 누워있던 여동생은 스님이 왔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합장했다. “스님, 안녕하세요.” “몸도 편치 않은데 누워 계세요. 마음만 받을게요.” 간단히 쾌유기도를 하고 그녀와 담소를 나눴다. 말기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50세였다. 미혼이었고 무척 동안
“스님! 안녕하십니까?” 길을 가로막는 듯한 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병원로비에서 거사님 한 분이 밝은 표정으로 합장인사를 하고 계셨다. “네! 반갑습니다. 몇 호에 입원하셨어요?” “6층 병동입니다. 입원했다 퇴원했다 그러는 중입니다.” “빨리 치료받고 완쾌하셔서 정상적인 생활 하셔야죠!” “고맙습니다, 스님. 말씀만 들어도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근데 법당은 어디에 있죠?” “별관 103호에 있는데 법당 찾기가 조금 어려워요. 한번 같이 가보실래요?” “예~ 고맙습니다.” 법당에 도착하자 거사님은 부처님전에 정중히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찻잔을 앞에 두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디가 편찮으신 건가요?” “폐가 안 좋다고 합니다.” “하시는
“스님~ 저희 병실에도 오셨네요. 호호!” 경찰병원 병실을 순회하며 환자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어느 병실에서 한 보살님을 만났다. 자신의 이름이 ‘숙희’라며 앉을 자리까지 마련해준 보살님은 전혀 환자로 보이지 않았다. 환자보다는 간병인에 가까울 만큼 웃음이 많고 목소리도 밝았다.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시던지 그 이후로 숙희 보살님이 있는 병실을 방문하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숙희 보살님은 몸이 좋지 않아 몇 년 동안 수시로 병원 입ㆍ퇴원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먹을 것이 있으면 같은 병실 환자들과 고루 나눴다. 특히 자신도 같은 환자인데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한 인연으로 아는 환우들을 찾아가 말벗을 해주며 상대방을 즐겁게 했다. 유쾌한 성격 덕분이었는지 숙희 보살님은 경과가 좋아져 이내 퇴원했다.
경찰병원에 입원했던 전ㆍ의경 중에는 전역 이후에도 꼬박꼬박 문안 전화를 하고, 부처님오신날마다 특별한 영가등을 올리는 인연이 있다. 바로 ‘성우’라는 이름의 젊은이다. 이름처럼 굵직한 목소리가 제법 잘 어울리는 이 친구는 청도에 살며 현재 구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성우가 경찰병원 5층 병실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전경으로 근무하다 시위 진압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한 그였다. “스님! 안녕하십니꺼! 여기도 법당이 있습니꺼?”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나의 귀에 퍽 익은 사투리가 들렸다. 성우와의 첫 대면이었다. 씩씩한 목소리로 처음 보는 스님에게 법당 위치를 묻는 모습이 기특해 첫 만남부터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친구였다. “우리 어머님이 절에 다니십니더.” 어머니가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인 양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돈과 명예, 권력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다보면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질없는 것을 좇다가 일생을 마칠 수도 있다. ‘나도 혹시 그런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을 것이고 ‘난 아니야!’라고 부정하며 당당하게 외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법회를 할 때마다 종종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하곤 한다. 대중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감각으로 느낀 것이기에 확실하다고 믿고,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닐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거짓투성이 오물들이 묻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 교정활동에 발을 디딘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교도소에서 첫 법회를 진행할 때였다. 오전에는 이미 경찰서에서 범죄없는 세상만들기를 주제로 강연이 진행된 상태였다. 강단에 서자 어떤 법문을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재소자들에게 어떤 말이 와 닿을지 고민하다가 내가 몸소 체험한 인연법을 털어 놓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떠났다. 이후 6년이 지나, 아들이 나와 같은 모습으로 떠나게 된 사연이 있다. 법문을 하면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나는 내 아들을 통해 옛날 내 부모에게 불효한 일을 스스로 반성하고 그런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는 이야기로 법회를 마쳤다. 큰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고, 모두가 함께 울고 말았다. 한 재소자는
지금껏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참으로 많은 사연들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늘 혼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저런 인연들로 얽혀 있었다. 누구나 제각기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또한 제각기 어울리는 환경에서 살아가야 편하다. 그런데 그것 또한 쉽지가 않은 일이다. 맑고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쉬리가 있는가 하면, 좀 심하게 과장해서 썩은 음식이나 오물에서 살아야 제대로 사는 구더기도 있다. 우리네 인생도 자연현상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제각기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살아가야 일신이 편안한 것이다. 오래전에 일 때문에 관공서에 갔다가 능력 있고 성실한 한 직원을 알게 되었다. 그 청년은 젊을 때는 공부만 하다가 혼기를 놓쳐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천주교 수녀님과 강연 차 강원도에 가는 길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갈 즈음 폭설로 차가 멈췄다.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 은세계가 펼쳐졌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차갑고 맑은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멀리 산에서 무언가 꼬물꼬물 내려와 지켜보는데 수녀님이 먼저 소리쳤다. “어머나, 토끼예요!” 배가 고파 먹이를 구하러 내려왔을까, 폭설에 길을 잃었을까, 어디로 갈지 몰라 겅중거리다 멈춰 서서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를 보고 저마다 귀엽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차에 동승한 누군가가 말했다. “통통하니 맛있겠는걸요.” 듣기 거북했지만 농담이려니 하며 조금 웃고 말았다. 토끼고기를 먹어본 이는 토끼를 맛으로 기억한다. 바로 업(業)의 결과이다. 업이란 인과관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
요즘 아이들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 살펴보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달고 기름지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줄줄 꿴다. 왜 아이들은 순하고 맑은 음식은 ‘맛없다’고 여기고, 달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은 ‘맛있다’고 느낄까. 가끔 엄마들에게 제철채소 반찬을 아이들 밥상에 올리라고 하면 “우리 아이는 원래 안 먹어요”라고 답한다. 과연 아이들의 입맛은 ‘원래’ 그런 것일까. 몇 년 전부터 여름방학마다 초등학교 급식 영양사를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급식레시피 개발이 목적이지만, 많은 영양사들이 나의 강의를 듣고 ‘음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정년이 2년 남았다는 한 영양사는, 지금껏 잘해왔는데 왜 이런 강의를 들
약초 공부 모임에 가는 길이었다. 가로수에 아슬아슬하게 얹힌 까치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추운 날 새들은 어디에서 먹이를 구하고 언 몸을 녹일까. 차가운 하늘을 헤매고 다닐 작은 새를 생각하니 불현듯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들었다. 측은지심이란 무엇인가. 바로 불교의 ‘자비’다. 남의 고통을 내 것처럼 슬퍼하는 마음이다. 사찰음식은 자비를 깨우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지방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자신을 알아보겠느냐고 했다. 어릴 적 고향 친구였다. 그녀는 방송에서 내가 스님이 되었음을 알았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단발머리 소녀를 초로의 여인과 스님으로 만든 세월이 서운하게 느껴진 것도 잠시, 나는 그녀가 녹록지 않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잡은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