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종교인으로서 민족 독립과 자생 고뇌 선학원 이사로 활동하며 한국 임제종 운동 이끌어 신간회 활동하며 고초도 “청년이여 만해를 배워라” 동시대 지성들 극찬의 평가 지난 6월 29일 선학원의 중앙선원(中央禪院) 법당에서는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 열반 69주기 추모다례재를 봉행하였다. 스님의 삶을 민족의 독립과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 구현을 위한 몸부림으로 규정짓는다면 이날의 다례재는 스님의 행적을 기리는 가장 어울리는 자리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근대사와 근대불교사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의 가치는 확고하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희박해져가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존재자체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행적을 두고 동시대를
선학원, 1931년 〈선원〉 창간 한국 禪 가치 재조명… 의미 커 수좌 배척 상황 극복 노력 맹신적 기복신앙에 경종 울려 일제 심전개발운동 등 비판 제시 민족불교 전통성 수호·중흥 도모 1930년대 치열한 수행현장 담아 선학원 역사 기록 역할도 〈선원(禪苑)〉지는 선학원의 기관지이면서 대중지이다. 1931년 10월 6일 창간해서 현재 통권 208호에 이르고 있다. 선학원의 설립정신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침체된 선의 중흥과 대중화에 있었다면 〈선원〉지의 성격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불교는 신령스러우면서 깨닫고, 고요하면서 비추는 일물(一物)을 가르쳐서 혹은 불(佛)이라 하고 혹은 여래(如來)라 이르며, 선종에서는 이것을 가르쳐서 혹은 일영(一靈)의 진성(眞性
용성 스님 등 초청해 법회 및 참선 수행 남녀선우회 조직… 부인선우회 법인화까지 참선으로 타력신앙 극복…자주적 인간 꿈꿔 全수좌대회 등 봉행해 선학원 외연 확대도 1921년 민족불교를 회복하기 위해 창설한 선학원은 1924년부터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사찰령(寺刹令) 이후 불교계의 왜색불교화로 인한 왜곡과 변질이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불교계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과 통제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자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그 씨앗까지도 고사(枯死)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은 선학원이 1922년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조직을 통해 보다 안정적 기반 하에서 선의 부흥과 대중화를 모색했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꿈꾸었던 법인화(法人化
사찰령 반포 이후 선승 줄어 선학원 창설 이후 첫 행보 선우공제회 창립 추진 용성·성월 스님 등 82명 발기 자립 활로 찾아 중생구제 모토 동참자 수 1~2년사이 급증 1925년 법인 신청했지만 일제, 10년 지나 허가 ‘딴죽’ 선학원은 민족불교의 기치아래 그 정체성과 운영상의 독자성을 표방하면서 창설된 4개월 후 본격적인 행보에 들어갔다. 1922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에 걸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을 위한 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황용음(黃龍吟)·백학명(白鶴鳴)·오성월(吳惺月) 등 35명의 스님들은 선우공제회의 취지서(趣旨書)를 발표하였다. 거성(去聖)이 미원(彌遠)에 대법(大法)이 침륜(沈淪)하야 교도(敎徒)가 효성(曉星)과 여(如)한 중(中)에 학자(學者
사찰령 이후 본사 주지 권력 독점… 공의제 붕괴 가사대신 양복과 중절모 선사의 손에는 스테이크가 대처식육, 비승적 삶 야기?? 민족·전통 불교의 회복 표방하며 선학원 건립 선학원은 일제강점기 한일합방에 이어 사찰령이 공포되어 주지전횡과 대처식육의 풍조가 만연되는 상황에서 설립되었다. 그 설립의 이념과 취지가 종단이나 문중간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선학(先學)들의 목소리는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일찍이 강석주 스님과 박경훈 선생은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한국 불교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또 분열과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사찰령에 저항하여 한국 불교 본래의 모습을 지키고자 조용히
1921년 간동포교당서 서막 고승부터 궁중나인까지 갹출 현재까지 안국동 40번지 자리 ‘사찰령·왜색화 반대’ 기치 올려 민족불교 정체성 확립 천명해 선학원은 1921년 5월 15일 서울 간동포교당(諫洞布敎堂) 보살계 계단(戒壇)에서 설립의 서막을 열었고, 그해 8월 10일 기공(起工)을 거쳐 4개월 뒤인 11월 30일 준공되었다. 서울시 안국동 40번지. 당시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었던 그 자리에 지금도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설립의 직접적인 취지는 “사찰령과는 관계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禪房)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지만,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가 풀린 이후 거의 20여 년의 시기 동안 한국 불교계에 불어 닥친 질곡의 산물이었
1911년 공포 자주권 박탈 본말사법으로 일제통제 주지의 전횡 토대 만들어 산중공의제 말살의 원인 1926년 승려 ‘대처식육’ 인가 “조선 사람의 선방 만들자” 한국불교 존립 자각의 계기 선학원 설립으로 이어져 1921년 5월 15일 서울 간동포교당(諫洞布敎堂), 만공은 보살계 계단이 마련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조선(朝鮮) 중들은 자꾸만 일본(日本) 중처럼 변질이 돼 가고 있단 말입니다. 진실로 불조(佛祖) 정맥을 계승하려는 납자(衲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런 말이죠… 우린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을 하는 선방(禪房)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회의를 부치게 된 거올시다. 사찰령이 공포된 지 10년 후의 일이
조동종과 굴욕적 ‘맹약’한 원종 파괴 위해 임제종 운동 전개 사찰령 반포와 일본의 방해로 1912년 범어사에서 막 내려 ‘조선선교양종’ 왜색 불교 상징 1910년대는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의 일본지배가 본격화된 시점이다. 불교계 역시 1910년 10월 6일 조동종맹약, 1910년 11월 6일 맹약에 반대한 임제종 운동의 전개, 1911년 6월 3일 사찰령 반포 등 격랑이 일었고, 파도는 인간 군상들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각자 한국불교를 중흥시켜야 한다는 명분상의 목적은 같았지만, 걷는 길은 달랐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신념이 정법(正法)이었고, 개혁(改革)과 전통수호라는 이름이 목적지를 향한 각자가 선택한 지름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불교사
원종 창종… 불교계 결집 발원 사찰령 추진으로 인가 유보 결국 한국불교 독자성 와해 조동종 맹약 다분히 친일적 원종 고문 다케다 실권 장악 韓불교 日불교에 ‘매종’평가 민족불교 수호 운동 도화선 임제종 계승 선학원 설립 계기 1910년 10월 6일 일본, 조동종 맹약(曹洞宗盟約)이 체결되었다. 당시 한국불교의 중앙기관이었던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 원장 이회광(李晦光, 1862~1933)스님이 일본 조동종과 맺은 7개 조항의 연합맹약이었다. 이 맹약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너나할 것 없이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팔아넘기는 매종(賣宗)행위로 규정하였다. 조동종 맹약은 몇 가지 의미를 남기고 있다. 첫째, 한국불교를 점령하기 위한 일본의 점진적 노력에 의한 가시적 성과,
한국불교 스님들을 회유 일본 외무성도 적극 지원 日 불교 포교소 전국에 설립 韓 원흥사 건립… 견제에 실패 1876년 2월. 일명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기 시작한 19년 뒤, 승려의 도성출입이 재개되었다. 승려들은 도성출입 자체만으로도 불교탄압이 중지되었고, 사회적 지위 또한 향상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의 도성출입을 도왔던 일본 승려에게 감사장까지 헌정할 정도였다. 불교가 그동안 받고 살았던 탄압과 소외의 결과였다. 아이러니다. 설사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불교에 침투하여 점령할 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대응은 불가항력이었다. 강화도조약 자체가 일본의 식민지적 침략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도도하게, 그리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역사의 물결을 거스를
日 일련종 사노의 건의로 출금 해제 윤허는 일반론 여과 안된 일본 식민사관 ‘자체적 노력 결과’ 반론도 “당시 시대상을 냉정히 읽자” 1895년(고종 32) 3월 29일 승려들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는 금령(禁令)을 해제하였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 1861~1839)가 “승도(僧徒)들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금령(禁令)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아뢰자 고종이 윤허(允許)했다는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의하면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날 고종의 윤허는 그 후 한 두 차례 금지와
한국근대불교사는 시기적으로는 현대불교와 연결되어 있고, 그 성격이나 양상이 전시대인 조선시대와는 다르다. 이 시대는 수준 높은 사상이 더욱 발전한 것도 아니고, 불교계의 풍토가 세련되게 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왕조 전시기 동안 철저하게 폐허가 된 지경에서 다시 일어나 보니 세상은 뒤바뀌어 있었다. 산중에만 머물러 있던 시선이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면서 저자거리로 옮겨져야 했다. 또한 다들 변화와 개혁을 목 놓아 부르니 자의든 타의든 체질개선과 굳어있는 근육을 쓰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온 것이다. 실로 경황없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불교계는 유난히 근대불교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대와 고려의 불교사상이나 신앙, 그리